쥰나나나 조각글

개구리메모장님 썰 너무좋아서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듯, 들어올린 물건을 놓으면 추락하듯. 지독한 현실에 무너져 내려가는 가문을 보고도 동화같은 말을 믿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내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왕성의 경비는 밖과 안을 가리지 않고 살벌했지만,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시달릴만큼 시달린 다이바 나나에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훔치겠다는 목적이 아닌 이상 더더욱 그랬다. 분명 처음엔 땅에 떨어진 명성이라도 주워보려 했던 것 같은데. 그런 목적으로 접근했을텐데. 이제 빛 바랜 목적은 버린지 오래다. 

그녀의 방은 성의 가장 낮은 탑. 꼭대기 층도 아닌 중간 즈음에 애매하게 놓여있다. 아마 그 탑의 전체가 그녀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겠지만, 항시 같은 방에 있었기에 의미가 없었다. 꼭 그녀의 위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적나라한 위치. 처음 찾아냈을 때엔 참 알기 쉽다고만 여겼었는데 이제는, 그 위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가끔 생각한다. 이 곳에 있어 다행이라고. 그래야 바깥사람인 제가 날고 기어서  겨우 닿을 수 있으니까, 자조적으로 생각한다.


성의 담을 넘는 몸짓이 자연스럽다. 꼭 바람에 몸이 반쯤 들린듯 가볍고 날렵하게 움직였다. 큰 키에 어울리면서도 얼핏 어울리지 않은 동작이었다. 벽에 기대 주위를 살펴보고 눈을 살짝 감았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호흡을 옅게 내뱉고 높게 뛰었다. 족히 몇 백년은 자란 나무를 한 팔만으로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금방 땀이 맺혀 뒷목을 타고 느릿느릿 흘러내렸다. 발자국소리의 주인공은 얼핏 흔들거리는 나무를 올려다보았지만, 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 이전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도 않았지만. 발자국소리가 멀어져 가자 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길어져 이제는 저녁때가 한참 지나야 올 수 있었다. 경비원대의 시간을 새로 파악해야 하는 것은 둘째이고, 무엇보다 늦은 시간에 민폐이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매번 하곤 했다. 늘어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앞뒤로 어린아이의 발장구처럼 흔들리는 나나의 다리가 옅게 긴장으로 떨렸다. 
이런 모든 긴장도, 걱정도 네 얼굴을 보면 전부 잊어버려. 고개를 느리게 까딱이며 나나는 시야 바로 앞의 창문을 빤히 바라본다. 커튼이 쳐지지 않은 아치형의 창문은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오늘의 이름은 뭐니?"

창문이 열리는 찰나의 시간이 나나의 눈에는 끊긴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이어지는 것만 같았다. 눈부셔. 그야 늘 둘이 만나는 시간엔 해가 없었으니 방 안의 불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나나는 그것과는 다르다고 자기 자신에게 우기고만 싶었다.

"페튜니아, 예요."
"정말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야?"
"방금 알려드렸는걸요."

이름이 뭐니? 그 질문에 나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기에. 궁리 끝에 겨우 생각해낸 건 꽃이었다. 그날 그날 다른 꽃을 가져가며 - 가끔 꽃이 겹칠 때도 있었다. - 그 꽃의 이름으로 호칭을 뭉뚱그려 버렸다. 상대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별다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상냥하게도. 그렇게까지 상냥하기에 늘 창문을 열어주는 것일 터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조금 오랜만에 듣는 기분이어서, 나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나무를 탈때도 놓치지 않고 들고 온 꽃다발을 살짝 내밀었다.

"...보라색 꽃이구나."
"왕녀님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그리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여전히 부드럽지만 다그치는 어투에 나나는 활짝 웃었다. 타박을 들어도, 이것보다 더하게 날선 말을 들어도 이 사람이라면 그저 좋았다.

"네에, 쥰나 아가씨."

쥰나가 가벼히 손짓했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나나는 늘 이 즈음 망설인다. 겉보기엔 멀쩡한 척 하지만 바람 냄새와 먼지냄새가 뒤섞인, 이제는 의미 없는 검은조끼와 셔츠. 방금도 진흙을 밟았던 고동색 부츠가 신경쓰였다. 

"들어오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들어와 주었으면 좋겠는걸. 이미 행동과 눈빛으로 전부 보이는 말들을 구태여 입 밖으로까지 꺼내준다. 호시미 쥰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엇으로 빗대어도 제게는 과분한 사람. 나나는 애써 시큰이는 목울대를 꾹꾹 삼켜내었다. 


"이 꽃은 궁의 안에서도 본 것 같아."
"화단에 자주 쓰는 꽃이에요.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는 것이라, 아마 보셨을 거예요."

요즈음은 화단이 보이는 근방까지는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덧붙이려다 관두었다. 말의 거리를 조절하는 게 아직도 어려우면 안 될 텐데. 나나는 제 입가를 옅게 쓸어내렸다.

"설사 이 궁 안에 페튜니아 꽃밭이 흐드러지게 존재한대도 이 아이는 그들과 다를 거야."

쥰나는 웃으며 몇 송이 되지 않는 꽃다발을 다정히 만졌다. 꽃잎을 어떻게 만지면 다치고, 줄기를 어떻게 들면 상하고. 나나에겐 별 것 아닌 정보였으나 쥰나는 그것을 꼼꼼히 새겨듣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상대를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네가 준 거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정말 페튜니아일거니? 쥰나가 가만 물었다. 언제까지 자신을 속일수는 없다는 무거운 칼날과도 같았다. 나나는 그것이 날임을 알면서도 그대로 찔러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곧, 파티네요."
"그렇네... 정기적으로 열리는."

쥰나는 빈 꽃병에 꽃을 꽂으며 무게 없이 대답했다.
나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함을 느꼈다. 별 수 없는 일이다. 겁쟁이인 자신이라도, 언젠가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거짓은 반드시 드러난다. 언젠간 밝혀질 일이라면 제가 나서서 찔리는 것이 나았다. 비록 그것이 경멸을 담은 목소리라도 괜찮았다. 단 한번만이라도 괜찮으니 제 이름을 불리고 싶었다. 쥰나에게. 

"가실, 건가요?"

쥰나는 무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나보다 조금 더 청색이 섞인 에메랄드빛의 눈동자엔 막 꽃병에 꽂힌 보라색의 꽃만 한가득 담기었다. 생각보다도 단호한 거절에 살짝 조급해졌지만, 이럴때일수록 빙빙 돌아야 했다. 나나는 구태여 바로 묻지 않고 방을 둘러보았다.


쥰나는 늘 이 방에만 있었다. 나나가 찾아온 뒤로는 조금 더 자주 돌아다니게 되었지만 근본은 같았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이 방의 두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가만 두면 반대쪽 면까지 번지게 생겼으나 아슬아슬하게 막힌 것만 같았다. 장식이라곤 없는 삭막한 공간. 객관적인 시선으로는 그랬다. 처음에는 나나에게도 비슷한 감상이었지만 조금 달랐다. 

'많이 재미없지? 다들 그렇게 말하곤 했거든.'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책장을 보며 책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쓸쓸했다. 나나는 그 순간을 견딜수가 없었다.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꽃병을 창가에 두시는 건 어때요?'


"올 거니?"

꽃병을 탁자 위에 올려두느라 등만 보인채로 쥰나가 물었다. 옅게 기대를 품은 목소리가 나나에게는 슬프게 다가왔다. 다갈색의 가구가 전부인 방 안에 곱게 핀 보라색 꽃이 이질적으로 아름다웠다. 

"제가 오면, 오실 건가요?"
"갈게."

어떠한 망설임도 없는 답에 나나는 쓰게 웃었다. 제가 받고 있는 믿음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렵고 두려웠다. 

"....갈게요."

대답보다 빠르게 쥰나가 몸을 휙 돌렸다. 놀란듯 동그랗게 뜬 눈과 옅게 상기된 표정을 눈에 평생 담아둘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평생 보지 못해도 좋을텐데. 말은 되돌릴 수 없고 자신은 늘 겁쟁이인 그대로였다. 
당당할 수 없으니,

"이번 파티에 참석할게요."

차라리 숨어버리자. 이번을 마지막으로. 나나는 울고 싶었다.


"날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갈게요."

얼마 나누지 못한 대화가 못내 아쉬웠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동이 틀 때까지 어떻게든 머무르고 싶었으나, 나나는 더 이상 울컥이는 호흡을 참기 어려웠다. 쥰나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는 것 자체가 쥰나의 입장에선 아직 납득가지 않을 행위였으므로 더욱 억눌러야 했다.

"그렇네... 시간이 많이 늦기도 했고."

내용만 놓고 보면 담담하였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나는 팔자눈썹이 되어 쥰나를 바라보았다. 상대 역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이다. 아니면 저의 마음을 투영해서 보고 있는걸까. 나나는 이제 별로 자신이 없었다.

"...곧 파티에서 뵐 수 있을 거예요. 꼭 참석할게요."
"그렇네... 그러면 약속해줘."

제법 진지한 얼굴로 새끼 손가락을 내미는 쥰나를 보고 나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눅눅히 젖어 곧 흘러나올것만 같은 웃음으로 같이 새끼 손가락을 둥글게 걸고는 위아래로 살살 흔들었다. 약속이에요. 꼭 제게 다짐하듯 나나가 중얼거렸다.

"약속했으니, 그 땐 이름, 알려주기야."
"그걸 약속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머, 몰랐어?"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던 쥰나가 어설프게 웃었다.

"어쩐지 네가 비장해 보여서, 그 때 알려줄 것만 같았어."
"정말이지- 쥰나 아가씨에겐 뭘 숨길 수가 없는걸요."

가장 큰 비밀 하나를 등 뒤에 숨긴채로 나나는 태연히 미소지었다.


"잠깐. 오늘 가져온 꽃의 꽃말을 알려주지 않았는걸."

익숙하게 창가에 웅크려 앉아 다시 나무를 탈 준비를 하는 나나의 등을 다정한 말이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고 나갈 순간부터 눈물을 참지 못한 나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 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티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며 나나는 겨우겨우 대답했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나직하게 밤하늘을 적시는 것 같았다.

"마음의 평화. ...당신과 함께 있으면 편안해져요." 

마지막인 걸 알았다면 다른 꽃을 가져오는 게 좋았을 것을. 나나는 창가를 훌쩍 뛰어내려 사라져 버렸다. 쥰나가 그런 자신의 뒷모습을 구태여 좆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날은, 창문을 닫는 소리가 끝까지 들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나는 울면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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